창은 원시시대부터 사용된 대표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타제 석창과 마제 석창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부터
창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창두와 창 자루 끝 고리의 거리가 약 3m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창은 약 3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에는 부여인들이 활, 화살, 칼, 창으로 무기를 삼았으며, 보전(步戰)을 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옥저인들에 대한 설명에서도 역시 “성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고 보전을 잘한다”고 하였다.
창술은 삼국시대에 들어서도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무예였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발견되는 창들은 중국의 창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는데,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창의
공통적인특징은 날의 폭이 좁다는 데 있다. 이는 고조선의 좁은 놋창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후 조선 시대의 창에서도 이러한 모양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은 보병뿐 아니라 기병에게도 매우 중요한 무기였다. 기창(騎槍)은 북방의 기마 민족의 전통에서 내려온 것으로 고구려 중무장 기병은 동아시아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기창은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예로 자리 잡는다.
칼날이 한쪽에만 있는 것을 도(刀)라 하고 양쪽에 날이 있는 것을 검(劍)이라고 한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검을 숭상하였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도를 숭상하였다.
칼자루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차츰 백제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길이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 길이가
대개 80~100cm에 이른다. 환두대도의 고리는 끈을 달아 손목에 묶어 사용함으로써 칼을 놓치는 것을 방지하고, 칼 전체의 무게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장식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의 구실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검을 수련해 나이 열여덟 살 되던 해에 그 기예를 얻어 국선(國仙)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취도나 흠운과 같은 신라의 무사들이 칼 등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검술이 매우 일반적인 무예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무인이 흥했던 시절로 검술 또한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신이었던 김봉모와 밀직부사였던 배정지 등이 검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검법의 전술적 가치를 다시 깨닫고는 이를 적극 장려하여 본국검 예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등을 군영에서 십팔기의 기예로 익혔다.
활쏘기의 기원은 멀리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악이 많고 수성전(守成戰) 위주의 전투를 선호하였던 한민족에게 활쏘기는 매우 중요한 무예였다.
우리나라의 활은 크기가 작은 단궁(短弓)이며 나무와 뼈, 동물의 심줄 등을 사용해 만든 복합궁이다. 우리나라의 활은 중국이나 일본의 활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고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이 주몽(朱蒙)이었는데, 이는 부여말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었다.
활쏘기에 사용되는 활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정량궁(正兩弓)은 5척 5촌의 큰 활로 무과에서 사용하였으므로 모든 무인은 이 활을 쏠 수 있어야만 했다.
우리나라 활 가운데 특이한 것은 편전이다. 편전은 일반적인 활보다 길이가 짧아서(약 40cm 내외) 활에 바로 메겨 쏠 수 없고, 통아라는 특수한 보조 기구를 사용해야만 한다.
통아는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모양의 홈통으로 편전을 이 홈통에 걸고 활을 쏘게 된다. 편전은 최대 사거리가 약 1천보(약 600m)이며, 유효 사거리도 300보(약 240m)나 된다.
게다가 편전은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빨라 날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며, 적군이 편전의 화살을 주워도 길이가 짧기 때문에 통아 없이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편전을 다루는 기술도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편전, 중국의 장창, 일본의 조총을 최고의 무기로 치기도 했다.
도끼는 멀리 석기 시대부터 제작되어 활용되어 오던 무기이다. 백제의 병사가 신라의 장군 눌최를 도끼로 쳐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안악 3호분,
평양 역전 벽화 고분, 약수리 벽화 고분 등의 벽화에 도끼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월수(斧鉞手)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금이나 황동으로 장식된 도끼는
출정하는 장수에게 왕이 정벌과 통수권을 부여하는 상징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쇠낫(철겸. 鐵鎌)은 농기구인 낫과 마찬가지로 굽은 날을 가진 무기로 기병을 상대하여 말의 다리를 걸어 베거나 상대 기병의 목이나 팔 등을 걸어 베는 용도로
사용하던 무기였다. 가지극은 가지가 있는 극(戟)으로 긴 자루에 뾰족한 가지가 삐죽삐죽 나오게 하여 상대를 걸어 당길 수 있도록 한 무기였다. 신라와 가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무기였으며, 주로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가지극당(皆枝戟幢)이란 부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전문적으로
운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고리(鉤) 역시 기병전이나 수전(水戰) 등에서 사용하던 무기였다.쇠로 된 몽둥이인 철퇴는 의장용이나 호신용으로 사용되었다.
십팔기 이전에 보이는 맨손 격투 기술에는 수박과 각저가 있다. 일반적으로 수박(手搏)은 주먹이나 장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등의 타격계 기술을 말하고 각저(角抵)는
서로 걸고 잡아당기며 넘기는 관절계의 격투 기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술적으로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수박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수박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 책에 따르면 이의민은 의종을 살해할 때 등뼈를 꺾어 부러뜨렸다고 하는데, 손 가는 대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위력적인 기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려 시대엔 수박희라는 경기를 자주 행하였다.
각저는 한민족의 오랜 맨손 격투 기술 가운데 하나로 씨름의 고대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각은 겨룬다는 말이며, 저는 부닥쳐 맞선다는 의미이다. 각저의 기원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각저총 고분 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각저는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기록에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데,
왕이 참관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위로하기 위한 목적에서 많이 행해졌다. 민간에서는 명절 때에 씨름 경기를 놀이로 즐겼다.
조선 인조대의 무관 김여준은 효종을 따라 심양으로 가게 되었는데, 청나라 장수와 각저로 겨루게 된다. 이에 김여준은 먼저 주먹으로 상대의 코를 겨냥해 치고 들어간 뒤,
상대가 고개를 돌려 피하는 사이 그의 허리를 껴안아 메쳐서 피를 토하고 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십팔기는 고대로부터 이 땅에 전래되는 무예와 전쟁을 통해 새로이 입수한 무예 등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 새로이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우리의 전통 무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은 남쪽으로는 일본의 조총과 왜검술에 대항할 수 있는 무예를, 북쪽으로는 청의 주력 부대인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무예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와 정리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758년 등패 낭선 장창 당파 곤봉 장도(長刀)의 6기가 정리되고, 이후 1610년 권법 청룡언월도 협도곤 구창 왜검이 정리된다. 1759년에는 사도세자의 노력에 의해
이전의 무예들을 모두 18가지로 정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의 공식 무예인 십팔기이다. 이러한 성과의 바탕 위에서 십팔기를 전 군영에 보급 장려하기 위해
1790년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무예를 집대성한 예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십팔기는 어느 한순간에 급조된 무예가 아니라 선조부터 정조까지 약 20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정리되고 보완되면서 점진적으로 완성된 무예다. 특히 신라 화랑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는 ‘본국검’이나 우리나라의 고대 검법의 원형이며 중국이나 일본 등에 크게 영향을 끼친 ‘조선세법’과 같은 무예들은 우리 무예의 자부심을 대내외에
당당히 과시하고 있다.
십팔기는 유구한 동양 무예 역사에 있어서 그 완결판이다. 전통적인 무예들은 무기나 전술의 발달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다. 십팔기는 화약무기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무렵에 기존의 동양 무예를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즉 십팔기는 화약 무기와 짝을 이뤄 사용되는 단병 무예의 최종 완결판이었다.
십팔기를 이루고 있는 기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창 종류 다섯 가지가 포함돼 있다. 장창, 죽장창, 기창, 당파, 낭선. 장창(長槍)은 말 그대로 긴 창이고, 죽장창은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창이다.
기창(旗槍)은 창 끝에 깃발을 달아 각종 의식에 사용하는 것이다. 당파는 흔히 말하는 삼지창으로 주로 포졸들이 들고 다닌 주병장기였다.
낭선은 긴 대나무에 여러 갈래의 가지를 엇비슷하게 붙여 만든 것이다. 다섯 가지 모두 창 종류이지만 생김새도 다르고 사용하는 용법도 다르다.
다음에는 단병기인 칼이다. 쌍수도, 예도, 왜검, 교전, 제독검, 본국검, 쌍검, 등패. 모두 여덟 가지 기예다.
쌍수도(雙手刀)는 한 자루의 긴 칼을 두 손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쌍검은 두 자루의 칼을 사용한다.
등패(藤牌)는 방패와 칼이 짝을 이룬다. 왜검은 왜구의 검법을 연구하기 위해 실었으며, 교전은 왜검을 분석하여 이를 격검으로 구성한 것이다.
바로 김체건이 전한 왜검술이다.
본국검은 신라 화랑에게서 유래했다는 검법으로 본국(本國)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칼에 속하지만 자루가 길기 때문에 장병기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월도와 협도(挾刀)가 있다. 그리고 창이나 칼처럼 날카로운 날은 없지만 타격용 병기에 속하는
곤봉(棍棒)과 편곤(鞭棍)이 있다. 편곤은 긴 봉에다 짧은 봉을 고리로 연결한 것으로 쌍절곤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고 병장기가 아닌 맨손 무예로 권법이 있다.
이처럼 십팔기는 길고 짧고, 날카롭고 둔탁한 것이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 있어 완벽한 진용을 구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기예는 그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기법들을 모았다.
구한말까지 십팔기는 조선의 각 군영에서 장졸들이 익히던 기예였으며, 무과시험의 시취과목이었다. 하지만 일제에 강제로 나라가 병합된 이후 조선 무인의 상징이었던
십팔기는 철저한 탄압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십팔기를 익히던 조선의 무인들 다수는 일제에 항거해 의병이나 독립운동 대열에 합류한다.
일제 암흑기간 동안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던 십팔기는 광복되던 해 곧바로 등장한다. 1945년 광복 후 첫 개천절 행사에 십팔기 연무가 뜻 깊게 펼쳐진 것이다.
이는 일제에 의해 배척되었던 십팔기가 광복군에 의해 도도히 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이 행사는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던 유일한 신문이었던 매일신보에 상세한 기사가 실려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십팔기는 이후 다시 공식 석상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때 숨죽이던 친일세력이 다시 권력집단에 가세하게 되면서,
체육계와 무예계에도 일제 강점 하에 이 땅에 강제로 이식된 일본의 군사 체육들이 그대로 주류 문화로 눌러앉게 된 것이다.
조선의 무인들이 익히던 십팔기가 광복 후 25년이 지나서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오공 윤명덕 선생님 문중에서 기예를 전수받은
해범 김광석 선생님이 1970년 서울역 옆에 십팔기 도장을 연 것이다. 이는 십팔기 간판을 단 대한민국 최초의 도장이다.
해범 선생님이 직접 만든 대한십팔기협회와 한국무예원은 한국무예의 본가(本家)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며 십팔기를 국내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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